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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는 죽지 않는다: 현대 문학 속 다시 살아난 이야기들 1. 오래된 이야기누가 이야기의 유통기한을 정했을까? 산신령, 호랑이, 처녀귀신이 나오는 이야기를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런 설화들이 한국 현대문학 속에서 다시 걷기 시작했다. 허공에 ‘털썩’ 내려앉은 먼지처럼, 아주 조용하게. 설화란, 구전되어 내려오는 이야기들이다. 보통 ‘전래동화’ ‘민간신화’ ‘옛날이야기’로 불렸고, 구체적인 작가는 없지만, 이야기의 뼈대는 상상력과 삶의 지혜로 다져졌다. ‘흥부전’에서 ‘심청전’까지, 이 이야기들은 한 마디로 말하면, “살아남기 위해 꾸며낸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말들”이다. 1980년대 이후, 문학이 단순한 리얼리즘을 넘어서기 시작하면서, 작가들은 전통 설화 속 인물들과 플롯을 다시 호출한다. 대표적으로 박상륭 작가의『칠조어.. 2025. 7. 14.
1인칭, 3인칭, 그 사이를 걷는 문장들: 한국 문학에서 시점 1. 시점이라는 문학적 렌즈문학에서 ‘시점’이란, 이야기를 누구의 눈으로, 누구의 목소리로 보는지 결정하는 렌즈다. 1인칭(나), 3인칭(그/그녀), 전지적 작가 시점(모두 아는 신), 그리고 때론 ‘혼잣말처럼’ 되어버린 흐릿한 시점까지… 선택하는 시점에 따라 이야기는 눈빛과 눈물, 심지어 냄새까지 달라진다. 이 개념을 체계화한 사람은 러시아 형식주의 연구자이자 서사 이론가인 블라디미르 프로프와 게랄트 게나트 같은 이들이다. 그중에서도 미국의 내러티브 이론가 제럴드 프래터는 ‘시점에 따라 독자가 사건을 어떻게 인식하고, 어떻게 감정 이입을 하는지’를 명확히 구분했다. 2. 한국 문학의 시점 탐색처음 1인칭은, 마치 손 편지 같은 친밀함을 줬다. 예컨대 이태준의「해방 전후」에서는 ‘나’를 중심으로 일상의 .. 2025. 7. 11.
한국 소설의 목소리 교차점들: 다성성(폴리포니) 1. 폴리포니란 무엇인가?폴리포니(polyphony)는 간단히 말하면 ‘여러 목소리가 동시에 울리는 노래’요, 소설로 치면 여러 인물들이 각각 자기 목소리로 말하는 구조이다. 러시아 작가 미하일 바흐친이 이 개념을 철학적으로 설명했다. 그는 “진짜 소설은 단일한 작가의 시선만이 아니라, 인물들의 다양한 목소리가 서로 부딪치고 공명할 때 완성된다”라고 말했다. 바흐친은 소설이 작가의 독백이 아니라, 인물들의 대화라고 본 것이다. 서로 부딪히고, 충돌하고, 때로는 사라지고, 다시 튀어나오기도 하는 인물들의 ‘합창’ 말이다. 그 소리가 폴리포니다. 단 한 사람의 음정만 있는 건 칸타타가 아니라, 그냥 허전한 멜로디일 뿐이다.2. 한국 소설에서 폴리포니한국 소설에서도 여러 목소리를 섞는 이유는 명확하다. 우선 .. 2025. 7. 10.
한국 문학 속 은유적 표현: 상징과 알레고리 1. 은유, 상징, 알레고리말과 의미 사이에는 늘 틈이 있다. 우리가 “사랑”이라고만 말하면 너무 단순하고 낡은 느낌이다. 하지만 “쨍한 레모네이드빛으로 혀끝이 쓰라린 느낌”이라 하면, 마음이 저릿하다. 그 틈에 들어가는 게 은유(metaphor)다. 은유는 ‘A를 B처럼 말하는 것’이며, 상징(symbol)은 ‘한 사물이나 이미지가 다른 깊은 뜻을 담는 것이다. 알레고리(allegory)는 그걸 더 길게, 하나의 이야기처럼 확장시킨 것이다. 한마디로 은유는 ‘짤막한 퍼즐’, 상징은 ‘숨겨진 보물지도’, 알레고리는 ‘보물섬까지의 긴 항해’라고 할 수 있다. 조지프 캠벨과 클레어 패밀리의 따르면, 모든 이야기는 ‘숨겨진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장치이며, 이는 인간이 뿌리 깊게 공유하는 심리적 본능이라고 .. 2025. 7. 9.
전통 서사 구조와 한국 현대 소설 1. 전통 서사와 한국 현대 소설의 리듬전통 서사는 오래된 나무의 휘어진 가지 같다. 수백 년을 견디며 세월과 바람, 세상의 무게를 품고 있지만 늘 마지막엔 다시 열매를 맺기 위해 솟아오른다. 한국 소설도 그 가지 위에서 자연스럽게 열매를 맺고, 떨어지며, 다시 자라는 과정을 겪었다. 우리의 문학은 끊임없이 전통을 딛고, 그 위에서 현대를 새로 쓸 방법을 찾았다.2. 전통 서사 구조의 흐름전통 소설, 예컨대 김만중의『구운몽』이나 허균의『홍길동전』에는 서두–전개–위기–절정–결말의 다층적인 흐름이 있다. 그 구조는 시간이 직선처럼 이어지지 않고, 마치 산과 골짜기처럼 올랐다가 내려오는 굴곡으로 읽혔다. 그 서사의 힘은 전지적 시점보다는 인물의 삶의 질료에 더 집중한다. 길동의 모험, 정초의 꿈꾸기, 각 인물.. 2025. 7. 8.
말은 없지만 존재하는 목소리: 소설 속 서술자 1. 서술자서술자는, 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이야기를 쓰는 순간마다 창문을 닦고, 그 창문 너머로 우리가 서 있는 방까지 희미하게 그림자를 드리우는 존재이다. 한국 소설 속 서술자는 물 위에 떠 있는 연꽃처럼, 말하지 않아도 물결이 일면 이미 존재감을 전한다. 2. 시선의 시점들가장 친숙한 서술자는 부분적으로 전지적 전능자의 눈을 가진 목소리, 전지적 작가 시점이다.『감자』의 그 잔잔한 문장처럼 “그녀는 알았으리라”라고 한 줄 읊으며, 인물의 속마음 전체를 훑어버린다. 그러나 한국 소설에는 때로 전지적 시선 대신 마디마디 호흡하듯 턱 걸리는 ‘나’가 있다. 이 1인칭 서술자는 결정되지 않은 존재를 서술하며 서술 자체가 흔들리는 사람임을 드러낸다. 더 나아가 서술자는 단일한 존재가 아니기도 하다... 2025. 7. 7.